인식적 부정의에 대한 발제문
본 게시글의 내용은 미란다 프리커의 인식적 부정의 저서에 대한 설명과 저의 주장을 담은 발제문입니다.
3장. 증언에 대한 덕 인식론적 설명을 향하여
3.1. 변증법적 위치에 대한 스케치
저자는 화자가 청자의 증언을 들을 때 나타나는 인식적 현상에 대해 두 가지의 대립되는 입장(추론주의, 비추론주의)을 제시한다. 추론주의는 타인의 증언을 믿는 것이 정당화되려면 청자의 비판적 능력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장점이 있고, 비추론주의는 타인의 말을 믿을 때의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잘 설명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추론주의는 우리가 타인의 말을 믿을 때마다 매번 의식적인 추론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현상학적 불일치로 인한 한계점이 있고, 이로 인해 대화의 과정을 지나친 지성주의적 관점으로 비춘다는 비판이 있다. 비추론주의 또한 청자의 비판적 합리성의 작동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단점이 있고, 화자의 증언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책임이 약화된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저자는 두 입장 모두에서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보인다. “두 설명 모두 청자의 비판적 능력을 청자가 대화 상대로부터 지식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에 수면 모드에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비추론적 증언 수용의 입장에서 청자의 기본 입장을 ‘무비판적’ 대신 ‘무반성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제안한다. 비판과 반성의 차이는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들여다볼수록 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판의 대상은 내가 듣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화자에 집중되지만 반성은 그 화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나 자신에 집중하고 있다. 비추론적이라는 것이 일종의 자의식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 무반성이라는 표현을 이용하려는 것은 ‘인식의 주체는 결국 나’라는 것이 한층 강조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2. 책임 있는 청자?
저자는 증언을 듣는 청자의 책임을 화자의 증언에 대한 비추론적인 비판을 적재적소에 잘 수행하도록 증언적 감수성을 잘 훈련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책임을 덕 윤리학과 유비하여 증언에 대한 덕 인식론적 설명을 통해 청자가 추론하지 않고 대화 상대의 말을 적절히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상태를 덕을 갖추는 것에서 기인하여 서술하고 있다.
3.3. 유연한 지각 : 도덕적인 것과 인식적인 것
저자는 청자가 화자의 증언을 들을 때 화자에게 내장된 편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우선 청자는 화자에 대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화자의 증언을 믿을지 말지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판단의 기원인 신뢰성은 우리의 고정 관념에서 기원해 일종의 휴리스틱으로 진행된다. 유덕한 자가 행하는 휴리스틱은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문맥, 맥락에서 우리의 생각을 그 맥락에 맞게 조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저자는 휴리스틱의 과정이 편견으로 인해 오염될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지각 능력의 유연성을 이용한 훈련과 경험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연성을 이용해 편견에 의한 오염 가능성을 도덕적 지각 모델과의 유비를 통해 고정 관념을 조정하는 것을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지각 판단을 이론 적재성과 같은, 규칙같이 쓰인 고정관념의 체계에 따른 일반화를 지양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훈련에 대한 책임 또한 일종의 규칙주의로 편입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커의 논지를 따르면 편견을 ‘책임을 어기는 상황을 항상 부정의한 것’으로 간주하여야만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을 통한 훈련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것은 우리의 즉각적인 인지의 형성 과정과 그 형성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아예 배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4. 감수성 훈련하기
저자는 책임 있는 청자, 즉 유덕한 청자는 스스로의 증언적 감수성이 자신의 믿음에 따라 조정되며, 이러한 새로운 조정이 어떠한 비판적 반성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증언적 감수성의 훈련이 외재주의적 방법과 내재주의적 방법 모두에서 훈련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이 훈련을 통해 증언적 감수성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의 선례’처럼 “제 2의 본성”으로 체화시키기를 주문하고 있다.
4장. 증언적 정의의 덕
4.1. 편견을 고정하기
저자는 개인이 증언에 대해 내리는 자신의 신뢰성 판단에서 편견의 영향을 신빙성 있게 중화할 수 있는 능력을 증언적 정의의 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익숙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것을 교정하는 것, 덜 익숙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것의 영향에 대한 경각심이 지속적이며 적극적인 비판적인 반성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한 예시로 앞선 내용에서 리플리와 앵무새 죽이기에서 각각 여성 차별과 흑인 차별에 대한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저자는 리플리 영화에서 마지에 대한 무시가 단순히 여자에 대한 편견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의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독자는 3인칭의 시점에서 서술된 소설 때문에 마지의 믿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1인칭으로 스토리 안에 들어가보면 마지의 의견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배제하더라도 정말 의견의 성립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기반하면 리플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여성이라는 공격기제를 설정한 것이지 당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트리거, 즉 마지를 향한 무시에 대한 완전한 인과적 관계가 편견 때문일 것이라 단정하여 장담하는 것은 오히려 사건의 복잡성을 편견이라는 프레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4.2. 역사, 비난, 그리고 도덕적 실망
저자는 편견에 대한 역사적 환경의 의존, 역사적 우연성을 통하여 비난 불가능한 증언정 부정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역사적·문화적 거리를 둔 대상을 향한 도덕적 비난이 부적합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일상적인 도덕 담화적 움직임과 예외적인 도덕 담화적 움직임의 구분에서 기인하여 일상적인 도덕적 판단과 예외적인 도덕적 판단의 구분을 두어 여전히 그들의 역사적·문화적 거리를 둔 대상이 가진 모든 윤리적 자원을 감안했을 때 그들이 가질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사고들에 호소할 권리들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행위자에 대한 비난은 아니더라도 도덕적 분개라는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편견이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스스로를 갱신하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반복적인 비판적 성찰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판단에 필요한 사회적 반성성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우리가 그 덕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완전한 소유가 아니라 부분적 소유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는 편견, 증언적 경험, 교정, 본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단위를 제정하였다. 그런데 그 보편자로서의 단위들의 예화가 완벽히 이루어질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부정의라는 것은 갈등을 일으키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저자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행동 강령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백이 어느 정도 있는 채로 제시된 행동 강령은 그 기준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과 부정의가 생겨날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현재 편견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과거에는 덕이라는 이름 아래에 훈련하고자 노력한 결과일 수도 있고, 지금 우리가 훈련하고자 노력하는 어떤 태도들이 나중에는 일종의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는 프리커가 제안하는 자기 반성적 훈련을 통해 공공선으로 확실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5장. 증언적 정의의 계보학
5.1. 진리의 세 번째 근본적 덕
버나드 윌리엄스는 저서 ‘진리와 진실성’에서 진리의 추상적인 덕목을 정확성과 신실성의 두 종류로 제시하였다. 정확성은 참된 정보를 획득하는 탐구자의 덕목이고, 신실성은 획득한 정보를 타인에게 정직하게 전달하는 화자의 덕목이다. 저자인 프리커는 윌리엄스가 제시한 두 가지의 덕이 화자의 역할에만 집중되어 있음을 주장하고, 윌리엄스의 진리의 두 가지 추상적인 덕에 세 번째 추상적인 덕 ‘증언적 정의’를 더해 화자의 증언을 듣는 청자가 지켜야 할 덕을 주장한다.
프리커는 증언적 정의를 소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식적으로 훼손하는 것을 신빙성 있게 피하며,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진실을 놓치는 것도 신빙성 있게 피한다고 얘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덕은 훈련을 통해 몸에 밴 제2의 천성이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편견을 잡기 위해서는, 반사적으로 공정함을 유지하려는 훈련된 성품(덕)이 필요하다.”
증언적 정의를 따르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덕을 훈련하는 것은 규칙은 언어로 쓰인다. 덕 또한 언어로 쓰이고 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계승하여 덕을 일종의 비추론적인 기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언어의 층위에서 비추론적으로 쓰이는 언어와 추론적으로 쓰이는 언어를 구별할 수 있을까? 구별이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까?
5.2. 지적-윤리적 혼종으로서의 덕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덕의 구별은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 덕으로 나누어져왔다. 저자는 지적인 덕들이 일반적으로 진리를 궁극적 목적으로 갖고, 윤리적인 덕들이 일종의 좋음을 궁극적 목적으로 갖는다고 할 때 증언적 정의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적인 덕으로서 고려된 증언적 정의의 직접적인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신뢰성 판단에서 편견을 중화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진리이다. … 이제 만약 우리가 윤리적 덕으로서 고려된 증언적 정의의 직접적인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다시 한번 ‘신뢰성 판단에서 편견을 중화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정의이다. … 따라서 지적인 덕으로 고려되든, 윤리적인 덕으로 고려되든, 증언적 정의는 신뢰성 판단에서 편견을 중화한다는 동일한 개별화 동기를 포함한다.”
저자는 지적인 덕과 윤리적인 덕 간에서 어떤 것이 언제나 선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확정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윤리적인 덕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논리에서는 상황에 따라 둘 중 무게를 더 두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달라진다고 얘기한다(맥락주의적 접근). 하지만 책의 제목부터 인식적 부정의라는 대주제로 시작되고, 책의 내용 전반에서 편견으로 인한 부정의를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맥락주의적으로 무게를 다르게 두어야 한다는 상황의 예시에서 지적인 덕을 중시해야 하는 상황의 예시로 경범죄 현장에서 수사하는 상황을, 윤리적인 덕을 중시해야 하는 상황의 예시로 상담사가 10대와 대화하는 경우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둘 다 최종적인 목적에는 윤리적인 덕을 중시해야 하는 것으로 목적이 향하는 것임을 제안한다. 경범죄 상황에서의 예시를 생각해보자. 일차적으로 수사관의 수사는 엄밀함을 추구함으로써 지적인 덕을 추구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 엄밀함의 목적은 법적인 징벌 행위를 명확히 내리기 위함이고, 결국 그 징벌 행위는 범죄자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결국 표면적으로 지적인 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도 결국 그 끝엔 윤리적인 덕을 추구하기 위함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