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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에 관하여

ChatGPT, Claude, Gemini와 같은 대화형 도구를 비롯한 인공 지능 도구는 현재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와 있다. 2026년을 살아가는 대학생에게 인공 지능 도구는 삶의 모든 면에서 유용하든 유용하지 않든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고, 인공 지능 도구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필자의 직간접적 경험에 의하면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기업에서도 Claude Code를 비롯한 코딩 에이전트를 이용한 코딩 방법이 프론트엔드와 백엔드를 막론하여 주를 이루고 있고, 인공 지능 모델을 연구하는 대학원 연구실에서도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연구 주제에 대한 분석과 실험 세팅을 ChatGPT에게 물어보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2020년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인공 지능 도구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가속되었던 사회는 인공 지능 도구로 인해 한 번 더 가속되게 되었다. 이제는 뛰어가는 것도 벅차 인공 지능을 등에 업고 날아다녀야 해야 할 것만 같은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감상의 연장선으로 클로드 블루(Claude Blue)라는 표현이 생기기도 했다. 인공 지능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나의 일자리가 뺏길 것 같은 생각에 우울해지는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들이 가장 크게 겪고 있다고 한다. 그 누구라도 지금까지 잘 지켜온 일자리가 뺏긴다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현상을 보면 건국 초기 미국의 골드러시가 떠오르곤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도없이 쏟아지는 인공 지능 도구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번쩍번쩍해 보이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곱씹는 것은 사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나는 두 가지의 의견을 전하고 싶다. 첫 번째로는 인공 지능의 개발 과정 및 방법 자체에 대한 의견, 두 번째로는 인공 지능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다.


현재 인공 지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자료에는 Top-down의 형식으로 구성된 자료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우선 인공 지능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 사용법을 따라해보는 실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도구가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 지, 사용할 때 누르는 버튼을 클릭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선 궁금한 사람에 한해서만 따로 탐구해보라는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바로 버튼을 누르고, 버튼에 대한 아웃풋을 확인하는 방식이 우리의 도파민을 분출해내기엔 더 적합한 방식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부분의 방식들처럼 덮어놓고 버튼을 누르는 방법만 배우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만든 도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도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그 기반을 잘 파악하여 이용해야 안전하게 위로 설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속도를 희생하는 것이 인류의 안전을 담보하여 가장 싼 대체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인공 지능 도구 및 모델을 어떻게 파악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인공 지능 모델을 생물학적으로 타당하게, 개연성이 있게(biologically plausible)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시대에 쓰이는 Transformer를 비롯한 인공 지능 모델은 생물학, 경제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받아 그 구조를 완성했고 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저 성능적인 부분을 위해 수학적, 공학적인 방법을 이용해서만 모델을 구성한 부분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역전파 알고리즘이 있다. 역전파 알고리즘은 철저히 인공 지능 모델의 성능만을 위해 개발된 인공 지능 모델의 학습 기법이다. 이 알고리즘을 생물학적으로 타당하고 성능도 챙기면서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고 있는 알고리즘에는 Spiking Neural Network 등이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인공 지능 모델을 생물학적으로 타당하게 구성해야 우리가 인공 지능 모델과 도구를 더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더 분석하고 예방하기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인공 지능 모델을 가장 내 의견에 부합하게 개발하는 기업에는 Anthropic이 있다. Anthropic에서는 인공 지능 모델의 개발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는 전문 철학자가 기업의 고문으로 있고 https://askell.io/ , 인공 지능의 해석 가능성을 위한 생물학적인 분석에도 많은 연구적 기여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https://transformer-circuits.pub/2025/attribution-graphs/biology.html


물론 Anthropic이 자사의 안전 서약을 철회하여 논란이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 세상에 완벽한 기업이란 없다. 하지만 분명히 Anthropic이 모범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러한 장점은 장려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필자는 인공 지능을 골드러시에 비유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가는 사회가 되었다고 얘기했다. 인간은 오감을 비롯하여 말초적으로 느껴지는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도파민 보상 체계는 애석하게도 이러한 말초적인 자극에 반응하게끔 구성되었다. 그러한 체질에 기인하여 우리는 가만히 있더라도 어디론가 향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고, 쉬더라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의 인공 지능 도구의 개발 또한 이러한 세태를 적극 반영하여 말초적인 자극을 위시한 상품을 많이 개발하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철학자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피로사회’가 있고, 가만히 있음과 머무름의 미학을 현대 피로 사회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사람이다. 한병철은 현대 사회가 매끄러움만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인간과 도구 모두 있는 그대로의 거칠은 것은 억제시키고 걸리는 것 없이 매끄러워지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소리없이 우리는 세뇌시키고 있고, 우리는 말초적인 이념 없이 말초적인 자극만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성공, 성적, 효율성만을 추구한다고 얘기한다.


필자는 한병철의 주장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키치(Kitsch)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똥을 싼다. 똥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똥을 안 싸면 죽는다. 인간은 늘 똥을 싼다. 하지만 과거에서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은 똥을 싼 티를 내지 않게 되었다. 18세기 유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집에서 똥을 싸고 길바닥에 그대로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시대에 자기가 싼 똥을 들고 다니거나 던지면 경찰이 올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우리의 외양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매끄러워진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에 온다면 인간은 배설을 하지 않는 동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매일매일 똥을 싸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가깝다.


현대 생물학, 고고학, 역사학, 문헌학의 지식을 고려했을 때 인간이 선사 시대부터 똥을 싸왔음을 긍정하는 것에 부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중치를 두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똥 자체를 숨기고 똥을 싸는 모습을 숨기도록 문명적으로 진화해왔다. 똥을 비롯하여 가벼운 것을 부정해온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왔다. 현재 시대에는 그것이 인터넷과 인공 지능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항상 가벼운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덮어놓고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 한다. 이러한 화두는 꼭 지금 시대에 특별하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100년 전에도, 200년 전에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것이 등장할때마다 화두가 되었고, 지금 시대에 하필 인공 지능이 그 형태인 것이다.


과거 한바탕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사조가 폭풍처럼 몰아친 후에, 현대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 하에 지식과 이념이 파편화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전 지구적으로 일상 공유가 더 수월해진 현대보다 과거에 사람들의 삶의 형태는 훨씬 다양하고 파편화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현시대의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비슷한 출퇴근을 하고, 비슷한 수면을 취할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현 시대의 사람들이 더욱 파편화되었다고 느낄까. 그 이유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더욱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십리길만 떨어져 있는 마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소문으로만 전해듣지 잘 알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시대에 우리의 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보이고, 귀에는 너무 많은 것이 들린다. 너무 많은 자극이 우리를 감싸 나 자신이 없어진 느낌을 갖는다. 이러한 기분은 역설적으로 아무 자극이 없어질 때에도 느낄 수 있다. 공기 맑은 산골에서 마루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멍때리며 쳐다볼 때를 떠올려 보라. 하지만 많은 자극으로 인한 고양감은 우리의 정신을 뜨겁게 만들고, 적은 자극으로 인한 고양감은 우리를 차갑게 만든다. 우리는 차가워져야 한다. 뜨거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차갑기만 한 것은 동력을 잃는다. 다만 우리는 과열된 정신을 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 시대에 거대 담론이라는 것은 없어진 듯 보인다. 사람들은 돈을 종교처럼 떠받들며 산다. 문명의 발달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놓았지만, 인간은 돈 앞에서 다시 짐승처럼 맹목성을 드러낸다. 동물은 배고프면 먹이 앞에서 본능을 드러내고, 인간은 많은 돈을 갈구하는 본능을 드러낸다. 최근 서울시립대 출신인 아정당 대표가 1500억원에 기업을 엑싯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친구한테 1500억원이 생기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 돈을 이용해 더 많은 돈을 벌겠단다. 동물은 배부를 땐 먹이를 갈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돈이 많아도 돈을 더 벌려고 한다. 나는 자아 실현이라는 거창한 말은 잘 와닿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성이라는 이름 하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막상 그 이유에 대해 파고들다 보면 감성의 영역, 가벼운 영역을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이 감성일 뿐이고, 이성은 감성의 껍데기 위에 말 또는 논리라는 수단을 쌓아 놓은 구조물일 뿐이다. 우리는 단단하다면 한없이 단단한, 가볍다면 한없이 가벼운 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다시 생각해야 할 뿐이다.


아무리 인공 지능으로 무장하여 휘황찬란한 모델이나 제품들을 내놓아도 우리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필자의 의견이다. 눈에 보이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이 전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의 무수한 논쟁이 있었다. 실재론, 유물론, 유아론과 같은 주제는 차치하겠다.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정확히 무엇이냐고 구획할 수 있겠냐고 하면, 그건 상당히 어려운 주제다. 필자는 그 기준이 뒤를 돌아보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의견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만큼, 특히 현재의 인공 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만큼,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늘 뒤돌아보며 곱씹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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